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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에 대한 소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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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에 대한 소설

썰렁아재 2026. 2. 3. 06:43


​낡은 유리잔 속에 하얀 액체가 담겨 있었다. 뽀얀 막이 수면 위에 얇게 드리워진 것이, 어젯밤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다 남긴 우유였다. 햇살이 창을 넘어 탁자 위로 부서지는 아침, 나는 습관처럼 그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에게 우유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이었다.

​어릴 적, 우유는 성장의 묘약이었다. 뼈를 튼튼하게 하고 키를 크게 해준다는 부모님의 말에 나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하얀 액체를 들이켰다. 컵에 담긴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다가 코에 하얀 수염을 만들고 깔깔 웃던 기억. 갓 짜낸 듯 미지근하고 비릿한 우유 냄새가 나던 목장 체험학습, 송아지의 커다란 눈망울을 보며 경이로워했던 순간들. 우유는 쑥쑥 자라던 나의 유년 시절 그 자체였

다. 사춘기가 찾아오자, 우유는 조금 다른 의미가 되었다. 끓인 우유에 코코아 가루를 타서 마시던 밤. 늦게까지 책상에 앉아 고민하던 시간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던 위로였다. 짝사랑하는 친구와 몰래 주고받던 딸기 우유, 친구들과 왁자지껄 떠들며 매점에서 사 먹던 바나나 우유. 팩에 빨대를 꽂아 쪽쪽 빨아 마시던 그 달콤한 우유는 풋풋하고 불안정했던 나의 청춘을 대변했다. 우유 한 잔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미래를 꿈꾸며 밤늦게까지 공부하던 순간들. 우유는 열정과 고민으로 가득했던 청소년기였다.

​성인이 되어서는 우유가 한결같이 나를 지켜보는 존재가 되었다. 새벽 출근 전, 간단하게 시리얼에 우유를 말아 먹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지친 퇴근길에 차가운 우유 한 잔으로 갈증을 달래곤 했다. 홀로 보내는 밤, 따뜻하게 데운 우유는 고독을 녹이는 작은 온기가 되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나 자신을 돌보게 만드는 고요한 순간, 우유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어느덧 나이가 들어, 우유는 다시 한번 의미가 변했다. 이제는 손주들에게 컵에 우유를 따라주며 "키 크려면 우유 많이 마셔야지!"라고 말하는 할머니가 되었다. 아이들이 우유 수염을 만들고 웃는 모습을 보며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젖병에 담긴 우유를 물고 새근새근 잠든 아기의 모습에서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낀다. 뼈 건강을 위해 칼슘 강화 우유를 챙겨 마시며, 이제는 나의 건강을 위해 우유를 찾는다.

​탁자 위의 유리잔에 담긴 우유는 여전히 희고 깨끗하다. 다만, 그 위에 드리워진 얇은 막처럼, 나의 시간도 그렇게 흐르고 쌓여왔다. 우유는 나의 삶의 모든 순간에 함께하며, 변화하는 나를 묵묵히 지켜봐 준 시간의 증인이었다.

​나는 잔에 담긴 우유를 조용히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차갑고 부드러운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입안에 남는 고소하고 담백한 맛은, 내 삶의 모든 희로애락을 품고 있는 듯했다. 오늘도 우유는 나의 새로운 시간을 함께할 것이다.